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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의장군 곽재우의 위국헌신 리더십

지금부터 432년 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최대의 국난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를 까맣게 덮고 있었다. 부산진의 병력은 불과 1천여 명. 관군과 백성들은 왜적의 침공에 맞서 성을 반드시 사수하리라 각오를 다졌다. 후방에 토벌군이 모일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이날 부산진을 침공한 일본의 군선은 총 7백여 척으로 조선 침략 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일본의 무장(?~1600). 임진왜란 때에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으며,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은 뒤에 도쿠가와 이에..
지금부터 432년 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최대의 국난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였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함대가 부산포 앞바다를 까맣게 덮고 있었다. 부산진의 병력은 불과 1천여 명. 관군과 백성들은 왜적의 침공에 맞서 성을 반드시 사수하리라 각오를 다졌다. 후방에 토벌군이 모일 때까지 충분히 시간을 끌 작정이었다.
이날 부산진을 침공한 일본의 군선은 총 7백여 척으로 조선 침략 선봉을 맡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일본의 무장(?~1600). 임진왜란 때에 선봉장으로 조선에 출병하여 평양까지 침공하였으며, 도요토미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은 뒤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싸우다 패하여 살해되었다.
가 이끄는 제1군 18,700여 명이었다. 다음날 14일 새벽 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고니시가 지휘하는 왜군은 성의 삼면을 포위해 맹렬히 공격했다.
따라서 꺼져가는 국가의 운명(運命)을 되살리고자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몸을 헌신한 곽재우 장군의 삶의 발자취와 그의 의병활동 내용을 분석하여 현대적 관점에서 그의 리더십을 재조명하고 정리해 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고급제대 리더들에게 리더십 역량배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2015년 1월 공직생활 43년을 마감하고 사회 초년생이 된 지 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퇴직 후 재난안전 민방위 강사에 도전하여 주로 충청 지역과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강사활동을 하였다.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지식기부강사를 비롯한 독도의용수비대 연합회 소속 전문강사, 서울 서부지방법원 협의이혼 상담위원. 한국군사문제연구원 전문위원, 행정안전부 안전 전문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국방대학교 국방리더십개발원 연구교수로 5년간 근무하면서 리더십에 관한 독서활동과 리더십 콘텐츠 개발, 리더십 사례 연구 등에 주력하야 왔으며 주로 글로벌 현장 리더십과 국내외 명장 리더십을 국방리더십 저널지에 기고한 적이 있다. 고급제대 리더십 프로그램 팀에 들어가 영상물도 개발하였다.

우리나라를 지켜 온 것은 관군이 아니라 의병이다. 그 의병을 지휘한 사람은 무인이 아니라 문무 겸비의 선비였다. 그 대표적인 선비가 바로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다.

위국헌신, 솔선수범, 통합, 창의로 대표되는 곽재우 장군의 리더십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책임진 군의 리더, 공직자에게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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